아래 사진에서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저 곳을 베데스다 연못이라고 합니다. 두 개가 나란히 있다고 해서 쌍둥이 연못이라고도 불려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베데스다 연못이 성 밖에 위치해 있었고, 성전 기준으로 말하면 북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저 베데스다 연못 자리에 가보면 이슬람 시대, 십자군 시대 등 각 시대마다 세워진 건물 흔적들을 볼 수 있고, 그 옆에는 성 안나 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저 베데스다 연못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정결한 사람들만이 들어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라고 여겨서 성전 출입을 금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이런 유대인들의 사회상으로 인해서 베데스다 연못에 병자들이 모이게 했던 요인이 되었습니다. 성전에는 들어갈 수가 없고, 그들은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서 낫기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38년된 병자뿐만 아니라 많은 병자들이 간절히 낫기를 원했는데, 그들이 낫기를 원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성전에 들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전의 여인의 뜰이라든지, 백성들의 뜰을 단 한번이라도 밟아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로망은 성전이라고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그들의 모든 삶은 성전을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항상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영광스런 표현은 38된 병자에게는 한낱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병들어 있었던 38년 동안은 단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비운의 사나이였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6)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낫고 싶습니다”입니다. 그러나 그 낫고자 했던 이유는 단순히 ‘아프니까 낫고 싶어 할 것’라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가 낫고 싶었던 이유는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낫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것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요5:14). 결국 그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그가 간절히 열망했던 성전 출입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성전 출입하는 문은 성전 남쪽에 있었으니 그는 그의 자리를 들고 북쪽의 베데스다 연못에서 남쪽의 훌다문까지 걸어갔을 것이고, 이 광경을 유대인들이 모두 주목하여 봤던 것입니다(요5:10-11).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결케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세우시는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은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갖는 생각입니다. 그 생각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을 예수님께 내려 놓고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면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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