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방법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녀들을 교육하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① 질문 및 토론이 있습니다. 출12:26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이란 구절에서 보듯이 모든 절기에 어린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질문하고, 때로는 한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벌입니다. ② 시각적인 것을 활용하는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녀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수4:6 “너희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지게 하고, 그리고 의미를 전달합니다. ③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신11:19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④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도 중요한 교육 방법 중의 하나였습니다. 신31: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교육 내용
위에서 언급된 인용 구절을 보면 모두 구약 말씀입니다. 즉 이미 구약에서 자녀 교육에 대한 방법이 말씀으로 주어졌고, 그 말씀에 따라서 자녀 교육에 힘을 썼습니다. 자, 그럼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의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 백성에게 어떻게 행하셨는가?’입니다. 두 번째는 토라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백성에게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가르치다보니 그 교육 자체가 곧 역사 교육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육’이라는 시스템에 들어가는 순간 역사 의식, 민족의 정체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신실하심 등을 인식하게 됩니다. 토라를 체계적으로 배움으로써 어떻게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물론 수학, 지리학 등의 다른 과목들도 배웁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육 내용으로 ‘하나님’ 그리고 ‘토라’를 손꼽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가르침에 있어서 이미 언급한 바대로 질문, 토론, 시각적, 반복, 노래 등을 활용합니다.
어머니의 역할
교육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만3년이 될 때까지는 어머니의 책임 하에서 교육이 이뤄집니다. 잠1: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젊은 자”란 히브리어 “나아르”인데 어린 아이를 일컫습니다. 이 어린 아이의 특징은 아직 무엇을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별력이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의식 구조 및 정체성이 발달되지 않은 때 곧 미성년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심어 줍니다. 그렇게 교육을 하면 어릴 때부터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생깁니다. 토라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한 지식이 생깁니다. 잠1:4의 “근신함”이란 곧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을 말합니다. 그렇게 미성년들에게 교육을 해야하는데, 그 시기를 언제로 보느냐. 태어나면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수학이나 지리학 등의 과목은 이후에 배워도 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토라에 대해서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그 아이가 만3년이 될 때까지는 어머니가 이런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아직 아기인데, 그리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인데, 아직 쓸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는 아이에게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어머니의 품속에서 마치 젖을 빨듯이 아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토라에 대해서 어머니의 품속에서 빨아 먹습니다.
젖 떼기까지
삼상1:23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그 여자가 그의 아들을 양육하며 그가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한나가 기도하여 사무엘을 낳았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나가 사무엘을 키우지 않고 서원대로 엘리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는 사실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가 사무엘을 언제 엘리에게로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많이 인식하지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젖 떼기까지” 기다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대 문헌 중에 마카베오서가 있습니다. 마카베오2서 7,27에는 “내 아들아 이 어미를 불쌍하게 생각하여라. 나는 너를 아홉 달 동안 뱃속에 품었고 너에게 삼 년동안 젖을 먹였으며 지금 내 나이에 이르기까지 너를 기르고 교육하며 보살펴 왔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문헌에서 알 수 있듯이 “젖 떼기까지”란 곧 “3년의 기간”입니다. 그럼 한나는 3년동안 혹은 젖 떼기까지 사무엘을 어떻게 키웠겠습니까? 그냥 키우기만 했을까요? 아닙니다. 키우면서 삼상1:23의 기록대로 “그의 아들을 양육”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삶은 이러했습니다. 매일 예배 드리는 상번제에 동참했습니다. 상번제는 아침 상번제, 오후 상번제 두 번이 있었습니다(민28:1-8). 때로는 이 상번제를 드리는 시간을 “기도 시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행3:1).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던 시간은 상번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정오에 한 번 더 기도해서 하루에 세 번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다니엘은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세 번 기도를 한 경건한 사람입니다(단6:10). 그렇게 하루 두 번 혹은 세 번 기도를 드리다가 안식일을 맞이합니다. 안식일에는 상번제도 드릴 뿐만 아니라 안식일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민28:9-10). 이와 같이 유대인들의 일주일은 제사로 시작해서 제사로 이어졌습니다. 다니엘처럼, 베드로와 요한처럼 경건한 백성들은 이런 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물론 여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고, 아기가 있는 엄마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아기가 있는 엄마는 이 모든 기도와 제사에 혼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랑 같이 했습니다. 소리 내어서 기도할 때는 아기를 안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토라의 말씀을 읽을 때에도 아기를 안고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쉐마 이스라엘”(신6:4-9)을 자주 암송했습니다. 해가 뜰 때에도 암송하였고, 집을 출입할 때도 암송하였습니다. 물론 어머니들도 집을 출입할 때는 메주자를 만지면서 쉐마 이스라엘을 암송했습니다. 이렇게 암송할 때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아기는 그 암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안식일에는 안식일에 먹는 빵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그 빵을 ‘할라빵’이라고 부릅니다. 그 빵을 어머니가 정성을 다하여 만듭니다. 빵을 만들 때에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의 아기는 엄마 옆에서 같이 밀가루를 만집니다. 엄마는 그 반죽으로 놀게 하든지 같이 할라 빵을 만드는 일에 동참케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는 안식일에 대한 개념을 삶을 통해서 갖게 됩니다. 유월절에는 누룩을 제거하는 일이 큰 주제였습니다. 집안에 있는 누룩을 제거할 때 어머니 혼자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어머니 옆에는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누룩을 제거함으로 어린 아이들은 유월절에는 누룩을 제거해야 된다는 의식을 갖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우리는 노예들이었지만 지금은 자유를 얻었네”라는 가사로 된 노래가 있었습니다. 이 노래로 해방된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그 노래를 어른들도 부르고 아이들도 부릅니다. 유월절이 다가오면서 모든 아이들은 어머니로부터 유월절 노래를 배웁니다. 그럼으로써 아이들은 유월절이 무엇인지 점점 배우게 됩니다. 칠칠절에는 처음 난 열매에 리본을 답니다. 그리고 리본이 달린 열매를 바구니에 담습니다. 아이는 그것을 어머니 옆에서 보고 배우기도 하고, 같이 하면서 배우기도 합니다. 초막절에는 초막을 지으면서 초막절을 배웁니다. 초막을 짓기 위해서 재료를 준비하고, 세우고, 그리고 각종 도구들을 준비하고 정돈하는데, 항상 아이가 옆에 있습니다.
젖 떼기까지 아이를 양육한다는 말은 어머니가 이런 모든 일련의 생활들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말이며,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말을 한참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가르칩니다. 밀가루를 가리키면서 가르칩니다. 메주자를 가리키면서 가르칩니다. 열매를 가리키면서 가르칩니다. 안식일이 되면 가르치고, 유월절이 되면 가르칩니다. 시각적인 것을 활용해서, 노래를 활용해서, 반복을 통해서 가르칩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젖 떼기까지 이렇게 양육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양육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예배를 드릴 때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를 가르쳐야 합니다. 어머니가 기도할 때도 아기가 옆에 있어서 그 기도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아기는 옆에서 성경 읽는 소리를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즘에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보다 오히려 예배에 방해된다고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밖에 나가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말씀에 따라서 어머니들이 젖 떼기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양육하는 책임을 다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잠시 잠겨 봅니다.
<참고문헌>
Ralph Gower, The new manners and customs of Bible times, Moody Publishers. 2005.
알프레드 에더스하임, 메시아, 생명의 말씀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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